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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그리고 마켓 젠트리피케이션과 공공미술

젠트리피케이션과 공공미술 - 토론

"이런 프로젝트들은 몇 년 전부터 진행되었고, 새로운 대안 공간들의 창립을 자극했습니다. 지금은 약 20개에서 25개의 대안 공간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이런 발전과 함께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이 대안 공간들이 커뮤니티와 지역과 융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죠. 또한 이 대안 공간들이 지역사회의 문화 발전에 기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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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계약과 예술가의 권리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의 이 부분에 (미술)시장이 없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 되었을 때, 우리가 상상해온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an & Lia Perjovs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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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계약과 예술가의 권리 - 토론

"사진 작가로서 말씀을 드리자면 요즘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조금 웃긴 것 같아요. 요즘에 많은 것이 "흘러가는 대로 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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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응 인터뷰

"하지만 저는 석수지역이 유명해지고, 고급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단계씩 천천히 개발되고, 과거와 현재가 융화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곳을 좀더 고급화시키기 위해 작가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꿈은 시장의 중심공간을 시민들이 와서 예술을 즐길 수 있고, 시민과 예술가들이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장소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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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운기 인터뷰

"그리고 제가 여기서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현실적 상황입니다. 또한 저는 그들의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부에게 인지시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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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topic has been explored trough the text in relation to the patterns recognized as present in a variety of local contexts. Similar practices can be found in many examples of both the western cultures and eastern. However there are particular and specific conditions and related problems that are specific to their localities. Both in order to draw the connections between these localities and to relate them to the practices that spread across national and local borders we have conducted two interviews. The interviews were done with directors of two alternative art spaces in the wider Seoul metropolitan area, that deal with the urban redevelopment projects as well as they try to act artistically in public space. It has been our wish to do more interviews with other alternative art spaces directors in Korea but unfortunately due to the limited time spent here we were forced to limit our project to just two. The discussion that had followed after the reading of the text Gentrification & Public Art has also been concentrated to a discussion about the local context, and in this way the text has been used simply as a trigger to initiate this discussion and has not been the subject of the debate.

젠트리피케이션과 공공미술

정치적 전복의 도구 혹은 미화의 도구?

미술의 사적 혹은 공적 재정지원/펀딩 지난 번 포럼에서 우리는 작가의 권리를 규율화하는 계약과 그들의 기타 재정수입에 대한 문제에 포커스를 두었다. 우리는 이번 포럼을 시각예술분야에서의 재정지원/펀딩에 대해 짧게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우리는 공공미술이라 불리는 것이 무엇이며, 도시의 발전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논의할 것이고, 이와 함께 주체와 건축의 관계를 서술하고자 한다.
동시대의 맥락에서 미술은 본질적으로 공적 방식과 사적 방식의 두 가지 방식으로 재정이 지원되어 왔다. 비공산주의/사회주의적 국가에서 최근까지 지배적인 의견은 국가적인 미술지원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논증의 예로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구 소련USSR의 실례와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미술 상황이었다. 우리는 물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알려진 국가적 차원에서 강요된 미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적인 재정지원/펀딩 또한 (구매, 커미션, 개인 혹은 기업 측으로부터의 시상 등을 통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 지는데, 이들 중 몇몇은 정부의 재정지원/펀딩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 논의를 위한 좋은 출발점은 미국에서의 국가적 차원의 재정지원/펀딩과 이것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소개하는 것일 것이다. 프랭클린 루즈벨스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도입된 후에, 그 이전까지 미술의 지원이 열악했던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 최대 규모의 미술 프로그램이 미국연방정부에 의해 착수되었다는 것이 이슈가 되었다. 정부의 건물을 장식하기 위해 회화와 조각을 주문하는 몇 가지의 방안이 설정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고용과 '민주화' 를 창시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써 세계적 경제위기의 시대와 유럽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던 시기에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 미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속물적이지 않고, 교양 있는 뉴 딜러 (New Dealer: 뉴딜 정책의 주체를 뜻함: 번역자 주)에게 있어서 미술은 강력한 경제력과 함께 협력하여 나아갔고, 이 두 가지가 함께 명백하게 미국적인 문화를 창조했다. [1]
국가의 정체성과 자본주의적 가치를 장려하는 중요한 주체로서 미술의 중요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발전되었다. 1960년대, 냉전 시대의 프로파간다에서 이런 유대는 전례가 없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소련의 영향력의 확장에 대응하여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사회의 주체로서 미술과 예술가들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미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정부의 정책을 브랜드화하는 방식이 되었고, 이러한 의무들을 운영하기 위해 성립된 기구가 하나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어떤 특정한 양식을 허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강조되었다.
이런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담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에 의해 사용된 담론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예술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사심 없는 예술에 대해 말했다: '한 나라가 위대해지는데 있어서 권력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기여는 불가결합니다. 그러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기여 역시 불가결합니다. 특히 그 문제 제기가 사심 없는 태도에서 나온 것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가 권력을 이용하느냐 아니면 권력이 우리를 이용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2] 이것은 예술을 특정한 사안을 촉구하고자 하는 사심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정치에 의해 명백히 영향 받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예술에 대한 정부 차원의 간섭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된 논지는 예술이 정치에 의해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케네디의 연설에 제시되어 있다: '예술이 우리 문화의 뿌리를 북돋워주는 것이라면, 사회는 예술가에게 자신의 비전이 이끄는 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3]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바람직한 가치의 구조를 정의한다: '자유 사회에서 예술은 무기가 아니며, 논쟁과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들은 영혼의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 사회에서 문필가, 작곡가, 예술가의 최고의 의무는 결과에 관계없이 끝까지 자신에게 진실한 것입니다. 예술가는 진실에 대한 자신의 비전에 복무함으로써 나라에 가장 큰 봉사를 합니다.' [4] 따라서 예술이 자유로운 것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구 소련 USSR의 가치구조와 상반되는, 바람직한 가치구조 속에서 비평적인 것 조차도 포함되었다.
[5] 이러한 정부차원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재정적으로 예술을 자극시켰다. 케네디 정부 하에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던 아서 골드버그Arthur Goldberg는 앞으로 예정된 시즌이 취소될 위기에 있었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파업을 해결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기관의 재정적 긴장은 개인의 비현실적 박애주의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답으로 그는 공공, 전통적 후원자, 개인기업, 노동, 지방자치 그리고 연방정부로 구성된 '여섯 분야의 공동 협력'을 제안하였고, 이 모든 분야가 재정적 지원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역 문화 시설을 위한 보조금, 개인 후원을 장려하기 위한 세금 감면 혜택, 그리고 '여섯 분야'의 미래 협력에 대해 연구할 연방 자문회의의 설립 등을 추천했다' 새롭게 형성된 자문회의는 이후 하나의 경영수칙에 포함될,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제안 한 가지를 생략했다: '각 연방정부의 새로운 건물의 비용 중 타당한 비율은 총 비용의 1퍼센트를 넘지 않아야 하고, 이는 건물의 전체적인 디자인으로 통합되어야 하는 예술작품 구매에 할당되어야 한다.' [6]

이와 유사한 개념이 현재 사기업에게 요구되는 것에 포함되어 시행되어왔다. 문화를 위한 국가의 재정지원과는 다르게 대영 제국과 같은 몇몇 유럽국가에서처럼 예술이 사기업에 의해 지원 되었는데, 사기업이 이익 창출을 위해 건물을 세울 경우 '사회에 대한 의무'로서 공공미술을 설치하도록 국가로부터 의무 지워졌다. 사기업에 의해 이렇게 생성된 공간이 원칙적으로 공적 공간으로 불리지만, 이 공간은 실제로 이것을 발전시킨 누군가에 의해 규정된 방식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케네디 정부가 전체주의적 제도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로운 예술을 가지고 기획한 프로젝트는 추상적 표현주의 (엘리트주의적 노력의 일부로서)를 장려한 것 이외에도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촉진시킴으로써 '일상 속의 미술의 영향력/효력발생'을 지속적으로 장려했다. 이것은 예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의 미세한 변화와 함께 뉴딜에 의해 시작된 프로그램의 연속이었다.

공공미술 그리고 미술관

미술관이나 갤러리 바깥에서 실천된 미술이 갤러리 공간을 폄하하는 의미인 소위 '화이트 큐브'에 놓여 있는 미술 보다 의미심장한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일반적 추정이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새로운' 사회, 시간 등을 가져올 수 있는 예술이다. (여기서 단어 '새로운'은 그것의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예술은 '새로운' 것이어야 했다. 결국 건축과 정치 그리고 시각 예술과 수 많은 다른 분야에서 모더니스트의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는 옛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이 개념은 예술을 미술사와 역사의 진화적 내러티브의 소재로 다룬 미술사 담론의 일부로서 극복해야 될 것으로 널리 비판 받아왔다. 미술관은 그러한 것으로서 부정적 속성을 잃지 않았고, 미술은 공공적 영역으로의 진입을 통해 예술적 컨텍스트의 감금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공공미술은 삶 속으로 침투하는 '살아있는 미술live art'로 인식되어 왔다. '진실하고 살아있는 미술을 창조하기 위한 소망을 충족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살아있는 미술 live art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필연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즉, 언제, 어떤 상황에서 미술이 죽음 대신 '살아서 alive' 드러나는가?'

[7] 07보리스 그로이 Boris Groys는 자신의 에세이 '새로움에 대하여On new'에서 예술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본질적으로 모더니즘이 취했던 주장과 동일하며, 여기서 단지 '새로운' 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대체된 것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예술가들이 우선적으로 이것을 원하는 이유가 미술관에 내재된 축적하는 논리를 만족시키는 것이고, 이것이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시도했던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동시대 미술의 해방을 향한 계획의 아이러니, 특히 공공미술의 일시적인 형식들이 미술관을 버리고자 하는 계획의 아이러니는 이런 미술이 그 어떤 전통적 형식의 미술이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 미술관적 맥락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있다. 동시대 미술이 다른 일상적 오브제와 구별되는 더 이상의 그 어떤 시각적 차이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미술은 그것을 미술로서 명시해 주는 예술적 맥락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미술이 예술적 맥락에 도달하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미술로 존재하는데 사실상 실패할 것이다. 예술가들은 당신이 그것을 미술이라 부르는지, 아닌지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즉 그것을 예술로서 명시하는 예술가가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에 대해 답변하곤 하지만, 그것은 20세기 미술의 가장 중요한 유산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실상 어떤 오브제나 행위를 예술이라고 라벨 붙이는 행위가 예술가들을 예술가로서 정당화시키는 바로 그것이다. [8]카미엘 폰 빈켈 Camiel von Winkel은 미술관의 예술적 맥락이나 수사적 기교들이 공간이나 건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작품을 그 안에 배치하는 일종의 가상적 미술관, 즉 예술적 담론을 구성하는 사상, 텍스트, 이론 그리고 여타의 예술 작품들로 이루어진 가상적 미술관에 대한 명백한 논지를 펼쳤다. 미술관이 건물로 존재함으로써 미술이 예술적 맥락의 영역, 즉 가상적 미술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길, 예술작품으로서 제시되지 않은 공공 장소에서의 예술작품은 통행인들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인식되는 것에 실패할 것이라고 했다. 예술가들에 의해 무한한 공간으로 낭만화된 리얼리티는 미술관 내부로부터 바라보는 행위에 의해 그런 것으로 명시되는 것이다. 카미엘 폰 빈켈이 공공미술이 공공미술로서 인식되기 위해 미술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처럼, 그로이는 리얼리티/삶 그 자체도 미술관과 도서관 등과의 비교를 통해 리얼리티/삶으로 인식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미술관 컬렉션에 의해 아직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9] 리얼리티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가 미술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에 의해 영향 받는다. 하지만 장소의 변화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장소의 변화는 작가들에게 새로운 개념을 다루고 다른 정치적 입장을 획득하기 위한 일련의 완전히 새로운 도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런던의 여성미술가들은 런던의 유명갤러리들의 남성중심의 예술 현장에 맞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대안적 공간에 모이기 시작했다. 다른 여타 공간들 중에 그들은 개인의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전시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도들을 통해 그들은 여성에 대해 배타적인 공적 갤러리 현장의 문제를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에 대한 이중성의 역사 또한 다룰 수 있었다. 우리들이 흔히 정치적 공간으로서 공적 공간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이 사례는 또한 어떻게 사적 공간에 정치적인 것이 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공적 공간 그리고 공적 공간을 다루기

기술의 확대와 글로벌 자본의 미시적 이동과 관련하여 관계와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장소에 대한 관념도 재정의되었다. 주체와 위치는 현재 국가적 경계로부터 자유롭지만, 그들의 단일성은 분열되었고, 전위된 네트워크와 내러티브를 통한 복합적 소통과도 같이 확장되었고, 그들은 아직도 장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 상에서의 '사회적 장소'의 존재는 탈 중심화된 네트워크와 관계들이 포개지는 맥락으로서 동시대의 '초도시적 Transurban' [10] 맥락 내에서 장소를 이해하는데 우리를 돕는다.
맥락 내에서 장소를 이해하는데 우리를 돕는다. 기술의 확대와 글로벌 자본의 미시적 이동과 관련하여 관계와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장소에 대한 관념도 재정의되었다. 주체와 위치는 현재 국가적 경계로부터 자유롭지만, 그들의 단일성은 분열되었고, 전위된 네트워크와 내러티브를 통한 복합적 소통과도 같이 확장되었고, 그들은 아직도 장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 상에서의 '사회적 장소'의 존재는 탈 중심화된 네트워크와 관계들이 포개지는 맥락으로서 동시대의 '초도시적 Transurban' 맥락 내에서 장소를 이해하는데 우리를 돕는다. 몸은 건축물로 입장할 때 자신의 역할 (사용)을 이행하지만, 건축적 계획에 따라 규정된 공간을 위배한다. 따라서 몸은 건축물 안에서 항상 의심받게 된다. '사용'으로부터 '저항'으로 이동하는 것은 특수화된 것으로부터 '일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11] 이 움직임은 건축의 권력을 마치 몸의 권력처럼 외부로 드러나게 하는 담화를 시작했다. 민영화 정책의 확장에 따라 공적 공간의 축소가 이뤄지던 시기에 공적 공간 내에서 행위는 내재된 전복적인 의미를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거리의 그래피티(graf∫ti)에서 몸은 건축에 의해 형성된 경계를 넘어서려는 자신의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공공의 권위에 의해 규정된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건축물을 파손하면서 그래피티는 도시를 하나의 페이지로 사용한다. 그 페이지 위에 그래피티는 건축물에 의해 수행되는 포함과 배제의 정점 위에 포함과 배제에 미치는 자신의 효력을 덧붙이며 자신의 코드화된 언어를 나타낸다.

젠트리피케이션, 효율성 + 미화 그리고 미술의 잠재적 가능성

사회적 삶에 대한 분리된 실체로서 도시적 구조를 분리하면서 정부와 사적 협력체는 공적 공간의 바람직한 활용에 대해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Gentri∫cation)은 활용과 미화의 두 가지 이슈를 결합하는 논거에 의해 재개발이 합리화되는 과정을 위한 용어이다. 도시를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도시의 특정 지역을 재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얘기된다.

[12]

현대의 도시계획은 빈 공간을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장소들을 교차하는 자본의 흐름 속에서 공간은 자본을 창출하는 효율성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다루어진다. 남겨진 작은 빈 공간은 주로 소득이 낮은 사회적 계층과 소수 민족들에 의해 거주되는 공간으로 초도시적 삶의 글로벌 비즈니스의 시점에서 잉여공간내지는 결핍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시 재개발 계획의 주요 논제는 이런 공간들이 재개발 계획에 의해 고도의 효율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종종 발언에서 빠뜨리는 것은 재개발 이전에 이런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대다수의 거주자들이 재개발을 통해 얻어지는 고도의 효율성의 수확을 향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재개발 계획은 건축물이 도시공간을 가로지르며 권력 분할의 도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명백한 방식이다. 장소의 시각적 설계에 관계된 재개발 (이것은 미화라고 불린다) 과는 다르게 도시의 특정지역의 사회계층이 그 장소의 경제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던 더 나은 거주자들이나 사무실 빌딩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런 미화는 일반적으로 특정 종류의 공공미술의 도입과 함께 진행되는데, 이 공공미술은 명목상 개방된 공적 공간을 창조하면서 일반적 대중에게 유용한 것으로 설명된다. 예술가들은 도시 개발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즉, 도시공간을 '더욱 살기 좋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환경을 더욱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시각적 능력'을 사용하도록 초대받는다. 수많은 현대 도시들은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실현하도록 작가들을 초대한다. 예술가들은 도시 공간의 공간적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적 경험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들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공하도록 기대 받는다.
사실상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봉사하는 이런 종류의 재개발은 이런 변화가 이것이 가져오는 작은 불가피한 문제와 함께 일반 대중에게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담론에 의해 합리화된다. 마치 삶의 질을 보장한다는 것처럼 '시각적인 질'을 강조하면서 공공미술은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실패한 정부의 정치적 실패를 은폐하거나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종종 사용된다.
실제로 예술가들이 이런 의무를 위해 '전문적인 기술'을 가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것에 대해 카미엘 폰 빈켈 Camiel von Winkel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다음과 같은 진술로 설명한다: 동시대 미술은 그 어떤 전문적 기술의 형식을 포기함으로써 특수한 기술이나 전문적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켰고, 사실상 예술은 예술가들이 어떤 것을 예술로 레벨 붙이는 것을 (동시대적 실천이 확실히 주장하는 진술) 규정하는 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시에 우리는 예술가에 의한 전문적 기술의 특정한 형태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술가 그룹인WochenKlausur는 '물질을 형상화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된, 해법을 찾아가는 예술가의 능력이 생태학, 교육 그리고 도시계획과 같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라는 접근방식 하에 작업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가들이 비전문가라는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예술가들을 다른 전문가들로부터 구별하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 특별한 기술을 제공하는 그 무엇이 사실상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 의해 사용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본질적으로 주장했다. 전문화되지 않거나 전문기술을 보유하지 않음으로써 예술가들이 사실상 새로운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룹 WochenKlausur의 활동은 카미엘 폰 빈켈이 생각하고 있던 종류의 공공미술의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1] 초도시주의는 물질적 도시에서 비물질적 정보의 흐름으로 그리고 전통과 장소로부터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2] 일상의 삶은 필연적으로 분류를 넘어서는 사회주의적 주제이다. 이것은 우리가 분석적 도구를 사용하여 특수하게 구조화되고, 전문화된 행위들을 제외할 때 남는 것이고, 또한 그들의 합이다. 이것은 "잉여"로 남는 것이고, 또한 "모든 행위" 이다

[3] Ibid.

[4] Ibid.

[5] John Wetenhall Camelot's Legacy to Public Art: Aesthetic ideology in the New Frontier published in Critical Issues in Public Art: Content, Context and Controversy edited by Harriet F. Senie and Sally Webster

[6] Ibid.

[7] Boris Groys, 보리스 그로이 Boris Groys의 다음의 텍스트에서 인용: Boris Groys, (On New) (To Make Things Visible: Strategies of Contemporary Art) (Museum of Contemporary Art, Zagreb), 2006.

[8] 카미엘 반 빈켈 Camiel van Winkel의 다음의 텍스트에서 인용: Camiel van Winkel Art in Public Space in Conventions in Contemporary Art: Lectures and Debates Witte de With 2001.

[9] 보리스 그로이 Boris Groys의 다음의 텍스트에서 인용

[10] 초도시주의 Transurbanism는 물질적 도시에서 비물질적 정보의 흐름으로 그리고 전통과 장소로부터 세계화의 보다 거대한 흐름으로의 이동이라고 브랜든 레벨 Brandon Labelle에 의해 정의 되었다. 브랜든 레벨 Brandon Labelle의 다음의 텍스트에서 인용: Brandon Labelle in Split Space: Practice of Transurban Life from Surface Tension: Problematics of Site edited by Ken Ehrlich & Brandon LaBelle, Errant Bodies Press, 2003.

[11 ] 일상의 삶은 필연적으로 분류를 넘어서는 사회학적인 주제이다. 이것은 우리가 분석적 도구를 사용하여 특수하게 구조화되고, 전문화된 행위들을 제외할 때 남는 것이고, 또한 그들의 합이다. 이것은 "잉여"로 남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이다. 브랜든 레벨 Brandon Labelle의 다음의 텍스트에서 인용: Brandon Labelle in Split Space: Practice of Transurban Life from Surface Tension: Problematics of Site edited by Ken Ehrlich & Brandon LaBelle, Errant Bodies Press, 2003.

[12] 로잘린 도이췌 Rosalyn Deutsche의 다음의 텍스트에서 인용: Rosalyn Deutsche in Uneven Development: Public Art in New York City October, Vol. 47 (Winter, 1988), The MI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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